이 다음 글은 정말 제대로된 포스팅을 해야지. 라는 생각을 하고 글을 쓴다.
새벽 다섯 시에 글을 쓰는 불쌍한 중생이 모니터에 반사되어 비친다.

시험은 끝났지만 피곤함은 해소되지 않고, 고단함은 풀 길이 없다. 낙엽을 으스러뜨리며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느끼는 진동을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바람이 불지만 피부에는 촉각이 없어서 두리뭉술하다. 살아있으되 산게 아니오 그렇다고 죽었다고 하기엔 사지육신이 그럭저럭 잘 움직인다.

시험은 나 치고는 잘 본듯 싶다만 아직 점수는 나오지 않았다. 데이베드 처어칠 교수님의 이름에는 a가 하나요 D가 둘 C가 둘 있다. C와 D는 각각 이름의 맨 앞을 대문자로 장식하고 있을터이니, 이 교수가 저질이고 변태인 이유가 여기 있었구나 그냥 아무 근거없이 뇌까려본다. 그래 처어칠은 과연 저어질이다. 제발 학점만 좀 잘 줬으면 좋겠지만, 저번학기에 곽주현 교수에게 당한걸 생각하면 이빨에 몸살이 날 것 같아서 그냥 잊은채로 살아야겠다.

실험보고서는 여느때와 다른 박력으로 내게 안겨서 떠나갈줄은 모른다. 그냥 어디 확 나가서 뒤져랏 네 이놈 NMR 하면서 쫓아버리고 싶지만, NMR을 보는건 기초중에 기초요 biproduct가 무엇이며 어디에서 코딱지만큼 생겼을 이놈을 잡아낼 수 있을지 궁리하는 것도 실험보고서를 쓰는데는 꼭 필요한 녀석이라..디스커션은 어떻게 두 장을 채우지 라고 손가락이 노니는 이 순간에도 고뇌에 고뇌를 거듭하고 있지만, 역시 답이 없다. 난 애초에 안되먹는 글을 그럴싸하게 꾸미는 것에는 재능이 영 없나보다.

아니 실험보고서란게, 그냥 보고 들은거 적으면 되는거라고 생각했는데, 학점을 잘 받으려면 수많은 미사여구와 엄청난 페이지수가 필요한거다. 그냥 성실하게 내가 보고 들은 3장정도 분량만 적어가면 안되나요... 다 똑같이 실험했는데, 결과도 너무 뻔히 똑같은데 왜 나는 C를 받아야하는지. 가끔 초인적으로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는 등의 수고를 하며 글을 쓰는 사람이면 몰라, 그저 그런 insight를 가진 것 같은 보고서에도 A가 뜨는 것은 왜인가요. 보고서에 할애하는 시간도, 귀찮아하는 만큼의 열정도 같을 터인데 왜 나는 C인가요.

뭘 써야되는지 모른다면 이보다 더 고생을 했겠지만, 이렇게 모든걸 아는데 점수가 안나온다고 생각하는 나보다 더 많은 내적 고생을 하는 사람이 어디있을까 싶기도 하다. 보고서는 절대로 혼자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점점 깨닫는다. 왜냐면, 돌덩어리를 놓고 공책에 박박 문질러봤자, 떨어지는건 돌가루요 A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조건 나보다 잘난 사람을 앞에 앉혀놓고 시작해야한다.

아, 저번 실험은 유기 실험의 튜토리얼쯤 되는 삘이라고 하셨었는데, 내일 조모임에는, 신문사 회의에는 참석할 수 있을까, 저녁에 숙제는 낼 수 있을까, 아니, 실험 수업 들어가기 전에 보고서라도 다 쓸 수 있을까.

시험 전 보다 오히려 더 힘들다.

난 이미 지쳐있다. 고작 몇 년 살았다고 이렇게 지쳐야 하는지 모르겠다. 참 세상에 있는 모든 다른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적어도 우리 학교 밖에 있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지.

미래를 담보로 현실을 저당잡혀 저평가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나의 인생은, 혹은 나와 같은 느낌을 갖고 있다면,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이 행여나 있다면, 우리네 인생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틀린걸까.

콩 시루에 콩을 담아놓으면 콩은 비좁아도 비좁은지 모르고 행복할테다. 그래서 난 가끔 콩나물이 부러워지기도 한다. 그저 비가오면 오는대로 물을 먹고, 해가 뜨면 뜨는 대로 밥을 먹고, 단순하고 말초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맨날 혼자거나 힘들다고 지지리 궁상떠는 것도 감정 노동이고, 일이든 사람이든 가끔씩 상처받는 건 노동을 넘어서 착취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다. 그냥 내 몸은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하지만, 내 필름이 끊기는거야. 일주일 중에 일상적인 쳇바퀴같은 시간들의 자율성은 모두 버리고, 가장 중요한 순간들이라던가 행복한 순간들을 기억할 수 있거나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써놓고 보니까 굉장히 이기적인 발상이다. 삶에 행복한게 얼마나 된다고. 내 인생중에서 단물만 쏙 빼먹고 싶다는 말이랑 다를게 없다. 장자 가라사대 쓸모 없음을 쌓아야 그 위에 쓸모 있음이 자리를 잡듯, 내게 언젠간 찾아올 행복도 쳇바퀴와 쳇바퀴, 잿빛 하루하루를 쌓다 보면 언젠가는 무지개가 팡하고 그려질지도 모르는 노릇인데, 내가 너무 어리석게도 단물만 빼먹고 싶다라는 나태한 생각을 한걸까.

하지만 역시,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날 수록 내게 행복한 날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점점 줄어들어가는 가운데, 내게 성인의 마음가짐을 요구하는건 무리라고 본다.

아니, 당장 기운 내서 내일을 살아보라는 말 조차 어딘가 사치로 들리는건 왤까.

Posted by 유리달

2008/10/27 05:15 2008/10/27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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